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수·순천 10.19 사건 (문단 편집) === <[[봉선화]]>와 <바위고개> === 반란 당시 평소 정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좌파계열 시민과 학생들도 이들에게 협조한 정황이 '''외부에 왜곡된 정보로 퍼져나가며''', 사건은 점점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특히 학생들이 협조했던 사실은 이후에 '여학생들이 [[치마]]에 무기를 숨기고 접근해 진압군을 공격했다는 "[[카더라]] 통신"'식의 크게 과장된 이야기로 발전하기도 했다. 당시 계엄령이 선포된 지역은 [[빨갱이]] 협조자 색출이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반란군에 의해 살해된 민간인의 수보다 많은 수의 민간인들이 처단되었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반란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500명 남짓인데 비해 진압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6,000명 이상'''이다. 그것도 정부 발간 공식기록이다. 어찌되었든 쌍방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의 수는 반란 중 죽은 군인들의 수보다 결코 적지 않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살아남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원들이 '''복수에 눈이 뒤집혀 젊은 사람들은 일단 잡아가 죽이고 보는'''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총살당한 민초들은 총살이 집행되기 전 가곡 <[[봉선화]]>와 <바위고개>를 불러 현장에 있는 많은 이들이 눈시울을 붉혔으며, 이 일이 세인들에게 알려져 각 노래들이 다시 주목받는 한편, '''한동안''' 해당 지역에서는 '''암묵적인 금지곡'''이 되기도 하였다. 타 지역 사람들이 여수, 순천 등지에서 멋모르고 이 노래를 부르면 이상하다는 시선을 받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여순사건에서 반란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먼저 발생한 것은 기록, 목격담으로 확인된다.[* [[손양원]] 목사의 아들의 사망과 관련해서, 동인, 동신 형제의 여동생(손양원 목사의 딸)이 여수에서 순천으로 가면서 길거리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죽어있는 것을 목격한다. 또한, 안재선을 비롯해 당시 반란군에 동조하여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의 증언도 있다.] 또한, 진압군의 반란 진압 과정에서 반란군에 동조한 사람들에 대해 재판 과정 없이 보복성 학살이 자행된 것도 맞으며, 그 과정에서 관련 없던 사람이 많이 죽었다. 늘 그렇듯 양편이 다 총을 들고 있으면 양편에서 다 죽게 되어 있다.[* 반란군은 여수, 순천에 있던 [[미국인]] [[선교사]]나 군사고문단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참으로 이데올로기의 비극이라 하겠다. * 일부 진압군들은 지리산에 진압차 들어가는 대신 전라남도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반란군인 척하며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라고 한 다음, "반란군의 명령에 따라 모였으니 너희는 좌파 빨갱이다!" 하는 낚시 작전으로 마을사람들을 집단 학살하였다. 사실 반란군들이 행군할 때 마을사람들이 진압군인지 알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만세!"를 외쳤다는 일화도 있다. 반대로 고흥반도에서는 국군이 진입하자, 마을 사람들이 "인민군 만세!"라고 외쳤다가 학살당하였다.[* 실제로 빨치산 토벌 기간 동안 이런 일로 수백, 수천명이 죄없이 죽었다. 당장에 학살당한 사람들 중에는 좌, 우익이 뭔지도 모르고 저쪽 가서 서 있으란 말대로 했다가 죽은 사람도 흔하다.] * 진압군인지 반란군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군인들이 와도 집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 이럴 때는 마을 사람은 전원 학교 운동장에 집합하라는 명령에 따르지 않은 죄로 좌파으로 분류되어, 집집마다 군인들이 수색하며 사살했다. 심지어 각 섬에서 배 타고 육지로 나와 학교 운동장에 집합해야 했다. * 각 학교의 운동장 한켠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고, 20~40세의 모든 남성은 속옷만 입고 무릎 꿇고 앉은 채 경찰관 가족과 우익청년단의 심사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을 괴롭혔던 좌파와 그 부역자 외에도 평소 앙금이나 원한이 있었던 이들도 '''손가락으로 지목했으며'''[* 사건 관계자들은 이를 가리켜 '손가락 총'이라고 불렀다.] 그 외에도 손바닥이 투박하거나 군용 팬티를 입었거나, 머리가 짧거나, 심지어 [[관심법|딱 보면 빨갱이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이유로도 지목되었다. 이렇게 지목된 사람들은 다섯명 씩 손이 철사에 묶인 채 총살되어 구덩이에 던져진 뒤 장작과 기름으로 불태워졌으며, 이 광경은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과 다른 쪽에 있던 여자와 노약자들에게 여지없이 보여졌다. 게다가 5연대 1대대를 지휘하는 [[김종원]]은 아예 일본 헌병대 시절부터 간직해 온 [[일본도]]로 참수하다 지치면 총을 꺼내 사격연습하듯 총살했으며, 급기야 어느 골목에서 마주한 청년들조차 모두 현장에서 일본도로 베는 등 마치 분풀이 하듯 사람들을 죽여댔다. * 또한 이 광경은 외국인 기자들에 의해 기록되고 일부는 사진으로 남겨지기도 했으며, <라이프>지의 칼 마이던스 기자는 "울 수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묘사하였다. * 그리고 각 지방 면장들도 군경 앞에서 '''의무적으로 좌파세력을 지목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면민 중에서 좌파 30명만 추려내!" 하면 어떻게든 30명을 맞춰 지목해야 했다.[* 이것이 말도 안 되는 이유는 '''[[대숙청|할당량을 내렸다는 것 자체이다]]'''. 좌파과 부역자는 지역마다 들쑥날쑥일텐데 그 숫자를 정해놓고 추려내라는 것은 상식에도 어긋난다. 만약 할당량보다 숫자가 적다면 억울한 피해자가 생길 것이고, 많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가 생긴다.] 허나 이미 주요 좌파 세력은 반란군 14연대를 따라 입산하고 남은 것은 반란군이 군청창고를 깨서 나눠준 쌀 받아 먹은 사람밖에 없던 상황에서, 면장들은 할 수 없이 평소 고분고분하지 않던 사람 몇을 지목해야 했고, 그렇게 지목된 자들은 즉석에서 처형되었다. [[김종원]] 역시 이렇게 지목된 사람들을 [[일본도]]로 하나하나 목을 쳤는데, 얼마나 잔인한지 미군 보고서에서 '짐승같은 인간'이라고 특기할 정도였다. * 일부 마을에서는 주민들 간에 '''도장을 빌려줄 정도로''' 친분이 쌓인 것이 화가 되어,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남로당 가입실적을 내려는 당원이 마을 이장 이름으로 도장을 빌려 주민분들 존함을 당원 가입신청서에 올렸기 때문이다. * 심지어 여순 사건이 시작한 날 어떤 대위는 8~10명 정도의 [[악양면|악양]] [[고등공민학교]][* 현 악양중학교] 학생들을 산으로 끌고 가고는 [[일본도]]로 [[참수]]한 후[* 그 이유는 여순 사건을 일으킨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악양 고등공민학교 학생들에게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 학생을 살려놓은 채 그 학생에게 자신이 자른 목을 머리를 줄로 묶어 짊어진 채 산을 내려오게 하는 미친 짓까지 저질렀다고 한다. [[https://www.vop.co.kr/A00000474594.html|#]][* 기사에서는 학생들을 참수한 대위로 [[서종철]] 전 국방부장관을 지목하고 있지만, 정황상 서종철이 아니었단 것은 확실시된다. 당시 서종철은 [[제주 4.3 사건]] 초토화작전을 계획 중이던 제9연대 부연대장이었기에 여순 사건에 투입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럼 여순 건으로 죽은 전체 민간인은 몇 명인가? 당시 방송과 신문은 반란군이 3,000명 이상의 주민을 학살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당시 국방부는 7,000명이라고 발표하고, 이듬해 전남 보건후생부는 이재민 구호자료에서 여수 등 7개 지역에서 2,634명이 사망하고 4,325명이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즉 7,000명 가량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좌파 세력이 죽인 사람은 1,300명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